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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하아빈
조회 2회 작성일 26-09-04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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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미술관. /네이버 블로그
한세광과 안익태의 십여 년 만의 재회. 첫날의 자투리 시간에 필라델피아 시청을 거쳐 도서관으로 갔다. 입구에 자리 잡은 검정 대리석 흉상, 셰익스피어였다. 둘은 모자를 벗었다. 받침돌 대리석에 그의 명구가 새겨져 있었다.
“All the world‘s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
세계는 무대요,
사나이들과 여인들은 한낱 배우들이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미술박물관으로 걸어갔다. 안익태의 걸음걸이는 느림보였다. 걸음에도 박자를 맞추고 리듬이 있게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세광은 지지 않으려 했다. “이 사람아, 이 세상에 음악이면 제일인가! 나는 철학가이거든. 지금 우리는 이 거리를 걷고 있지만 지구 위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고 있지 않는가, 하고 사색을 하면서 걸어가야지.”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로댕기념관 앞에 닿았다. 안익태는 로댕의 ‘묵상하는 사나이’를 한참 바라보면서 “로댕은 미켈란젤로와 함께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조각가야.” 하고 감격했다.
하얀 대리석 외관의 웅장한 건물, 필라델피아의 자존심인 미술박물관. 고흐의 ‘해바라기’를 비롯해 세잔, 드가, 반 동겐, 아망 장, 고야의 작품들이 조선의 두 젊은이를 예술적 마취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다음 차례는 ‘먹고 자는’ 현실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장면을 ‘늙은 한흑구’는 앞의 글에서 이렇게 풀어놨다.
<우리 둘은 밖으로 나오자 현관 앞 층대에 앉아서 살아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 시험을 볼 때까지는 내 방에서 같이 지내야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안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렇지. 돌아갈 여비도 없는걸.”
안은 그 작은 눈을 더 작게 하면서 돌층층대를 내려다보았다.
“응. 염려 말게. 자넨 담배도 술도 안 먹으니까 그리 큰 비용이야 들겠나. 나하고 한 침대에 자면서 부부같이 지내면 안 되겠나.”
응당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으나 혼자 벌어서 둘이 고학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수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속으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학생 시험에 꼭 패스를 해야겠어.”
안은 이렇게 결심하는 빛을 보여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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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하는 안익태. /안익태기념재단 홈페이지
1933년 2월에 축출 위기에 내몰렸던 안익태의 새로운 희망은 한세광에 의지하면서 커티스음악학교 장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그즈음에 안익태는 왜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다는 혐의 때문에 축출 위기를 겪어야 했을까? 이것은 그가 필라델피아에 오고 나서 한 달 뒤에 제32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취임 연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29년 가을에 들이닥친 대공황을 극복해나가는 미국사회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이성도 없고, 근거도 없고, 정당하지도 않은 공포는 후퇴를 전진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노력을 마비시킵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 저명한 연설에는 미국사회가 짊어진 고통의 실상을 엔간히 수사적으로 묘사한 문장도 담겨 있었다.
“상업 거래에서는 돈이 돌고 있지 않습니다. 생산 기업은 말라죽은 잎사귀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습니다. 수만의 가정에서 다년간 저축해온 돈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수의 실업자들이 냉혹한 생존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또한 다수의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적은 보수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네이버 블로그
테네시강 댐 건설 모습. /네이버 블로그
이러한 대공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루스벨트는 시민 개개인이 보유한 금(金)을 거의 강제로 거둬들이고 그 유명한 뉴딜정책을 들고 나온다. 그의 정책은 그의 연설과는 딴판으로 추호의 수사도 없이 강력한 물리적 동력으로 전진하게 된다.
세계의 음악 수재들이 경쟁하는 커티스음악학교 장학생 선발 시험. 7등까지 합격이다. 안익태는 필라델피아의 첫 밤부터 셋방에 틀어박혀 첼로 연습에 몰두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자정까지, 또 새벽 세 시부터 조반 때까지 그는 거의 쉬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첼로만 연습하였다. 모든 열정을 첼로 연주에 쏟아 붓는 음악가의 눈과 귀에는 다른 어떤 사물도 의미가 없는 시간이었다. 빨래도 청소도 식사 준비도 설거지도 한세광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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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이 이틀 남았다. 안익태는 새벽 세 시부터 쉼 없이 첼로를 켜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누군가 요란하게 문을 두드렸다. 첼로 소리가 멈추었다. 한세광이 실내복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뚱뚱한 중년 사나이, 바로 아랫방 사람이었다. 분개한 목소리로 머리를 흔들고 두 손을 휘저었다. 아직 영어가 짧은 첼리스트는 분위기로만 알아채고, 셋방 주인은 공손히 들어줬다.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윗방에서 천둥벼락을 치는 소리같이 첼로 소리가 온 천장을 울려대니 잠을 못 자겠다, 오늘부터는 오전 여덟 시가 지나기 전까지는 아예 첼로를 긁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정신병원으로 가든지 너희들이 이사를 가라, 그놈의 G선을 뿌욱 그을 때는 내 배꼽 밑의 물건까지도 흔들려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템플대 교향악단. /네이버 블로그
커티스음악학교 로고. /네이버 블로그
다음날 꼭두새벽이었다. 한세광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이번에도 아랫방 사내였다. 다짜고짜 너희들은 약속을 어겼으니 내가 정신병원 가기 전에 나가라고 요구했다. 집주인 할머니도 불러놨다니, 정말 방을 빼야 하는 형세였다. 안익태가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슬리퍼 두 개를 첼로 밑에 받치고 연습했노라고 자백했다. 한세광은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옛날 집이라 방바닥이 마루여서 그럴 거라고 친구를 위로한 그가 문 앞에 버텨선 사내에게 다가갔다. “좋습니다! 이제부터 첼로 소리를 내지 않고 오늘 안으로 이사를 할 터이니 안심하시고 정신병원에 가실 생각을 마시오.” 그는 자세를 바로하고 똑똑한 목소리로 그 뚱뚱한 사내에게 선언했다. “내일이 시험인데 갑자기 어디 가서 방을 얻나?” 안익태가 근심스레 물었다.
아랫방 홀아비의 예고대로 집주인이 나타났다. 한세광이 털어놓은 며칠간의 사정을 들어본 할머니가 뜻밖의 친절을 베풀었다. 손자가 쓰는 아래층 구석방이 방학이라 비었으니 오늘 하룻밤은 그 방에 가서 맘껏 연습하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시험일. 한세광은 하루 일을 쉬고 안익태를 커티스음악학교로 안내했다. 응시생은 모두 서른 명이었다. 일곱 번째로는 걸릴 것인가?
안익태는 아홉 번째 .수였다. 열 번째 .수를 받은 캐나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억울해서 울고, 아홉 번째 .수를 받은 조선 첼리스트는 억울해도 울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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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느냐, 참느냐. 엿새 전에 흉상으로 만났던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빌리더라도, 그것은 안익태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 당장에 어떡할 것인가? 이것이 그의 문제였다.
안익태가 주저 없이 친구에게 부탁했다. 굉장히 난처한 일을 그저 ‘철없는’ 예술가답게 내놓았다. “템플대학 음악과에 나를 장학생으로 좀 넣어주게나. 자넨 총장을 잘 알지 않나.” 한세광은 그를 데리고 찰스 베리(Charles Buery) 총장을 찾아갔다. 한승곤의 후광과 한세광의 평판에다 안익태의 스크랩북이 더해졌다. 그는 템플대학 기악과에 외국인 장학생이 되었다.
안익태는 거기서 부탁을 멈추지 않았다. 커티스음악학교 짐바리스트 교수에게 개인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졸랐다. 다시 한세광은 의지를 곧추세우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시간을 얻어냈다. 입도 크고 코도 크고 앞이마가 벗겨진 짐바리스트는 깐깐하면서도 친절했다. 우리 둘은 고학생이지만 배움에 주려서 미국까지 유학을 왔으니 선생님께서 미스터 안에게 한 주일에 단 한 시간이라도 개인교수를 해 달라는 한세광의 부탁에 짐바리스트는 난색을 표했다. 그럴 만했다. 커티스음악학교 외에도 보스턴, 뉴욕, 워싱턴의 세 학교에 비행기로 강의를 더 나간다지 않는가. 거절의 순간에 두 사람은 비장의 무기를 들이밀었다. 안익태가 스크랩북을 펼치자, 한세광이 얼른 설명했다.
“이것은 선생님이 일본에서 미스터 안의 연주회에 오셨을 때의 아사히신문 기사입니다. 일본 글이 되어서 모르시겠지만, 그때 선생님이 이런 평을 하신 것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안 군의 첼로의 음색은 동양적인 특색을 가진 애수적인 멜로디다. 앞으로 세계적인 대가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기대한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극구 칭찬하신 것을 잊으셨나요?”
짐바리스트는 신문에 실린 자기의 사진과 안익태의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 그렇군. 그렇지! 내가 그때 안 군의 연주회에 갔던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나의 기억력이 감퇴되었으니···.”
그가 안익태에게 악수를 청했다.
“미안하오. 잘 알아보지 못해서. 그럼, 내주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한 시부터 한 시간씩 배우도록 합시다.”
현관까지 배웅도 나온 짐바리스트는 안익태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격려했다.
“나는 나라도 없는 한국 학생이기 때문에 안 군을 잘 지도해주려는 것이오.” /이대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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