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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하아빈
조회 2회 작성일 26-09-14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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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도대교 현재 모습. 1960년대는 다리 아래에 국숫집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재건학생근로대와 슈샤인 보이 부산 영도다리는 가난과 애수와 비련의 상징이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 전 국민이 애창하던 유행가 가사가 상징하듯 전쟁 피난민들의 향수가 허공을 유랑하는 곳이다. 자살 명소로도 유명하다. 다리 아래는 초저가 국숫집과 。집이 다닥다닥 줄지어 섰다. 나도 몇 차례 국숫집 신세를 졌다. 1963년 즈음 재건학생근로대라는 것이 생겼다. 깡패, 부랑아들이 소탕되자 이들이 주도하던 허드렛일을 건전한 청소년 노동으로 대체하려는 정책이었다. 시 정부가 고안한 청소년 일자리의 하나가 구두닦이였다. 영도다리 근처에 위치한 시청에 신청서를 접수했다. 광복동 입구에 임시 구두닦이 센터가 설치되었다. 당시 구두는 남자의 얼굴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누구나 구두를 반질반질 닦아야만 온전한 신사 대접을 받았다. 구두닦이는 전쟁고아들의 전형적인 일자리였다. 일정한 거처에 집단 거주하면서 영업 구역을 나누는 조직이 형성되기도 했다. 6·25 전쟁 중에 '슈 샤인 보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야간부 학생들은 낮에도 일했지만 나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만 근무했다. 구두 닦는 일도 공정과 숙련도에 따라 분업이 이루어졌다. 일감은 숙달된 '찍새' 소년들이 물어온다. 나에게는 가장 초보 단계인 솔로 먼지를 터는 일이 주어졌다. 구두약을 바르고 광을 내는 일은 한껏 숙달된 장인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은 단 3주 만에 그만두었기에 승급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어느 날 우연히 중학 동창생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는 밀양 출신 여학생들과 함께 번화가인 광복동 나들이 중이었다. 나는 사복이 없었기에 배지를 뗀 학생복 차림으로 노동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당황하여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몹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3주간의 임금도 포기했다. 아주 먼 훗날, 그때 재건학생근로대의 '조장' 역할을 했던 모 사립학교 선배가 나를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내가 국제시장 양아치들 틈새에서 고생했다는 요지였다.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그 시절 기억을 되돌리기 싫어 그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오공게임랜드 한참 후에 마음을 고쳐먹고 수소문했더니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후문이다. 당시 그가 내게 따뜻한 시선을 준 것을 기억하기에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이다. 이런 애옥살이 중에서도 나는 이따금씩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재미를 누렸다. 부산고 도서관은 내가 입학하기 2년 전인 1961년에 개관한 것으로 장서는 4천 권에 못 미쳤으나 완전 개가식이었다. 도서관에서 늘 마주치는 급우가 있었다. 지리산 고을(산청) 태생으로 항상 웃는 얼굴의 성실하고 정직한 임민수는 담임 선생의 총애를 받았다. 후일 그가 펴낸 산문집에 발문을 썼다.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건축가가 된 '촌놈'의 진솔한 삶 이야기였다. "백사장보다 화물선을 먼저 보았다. 푸른 파도보다 방파제 안에 가두어진 잿빛 웅덩이를 먼저 보았다. 바다라고 했다… 예정에 없었던 나의 부산 생활은 초량 앞바다만큼이나 암울했다." "그래도 피할 곳이 있었다. 그 학교에는 도서관이란 곳이 있었다. 그것은 진짜 도서관이었다. 교과서나 입시용 참고서는 한 권도 없고 오로지 교양도서 일색이었다. 교양도서라고 해봐야 문학전집, 위인전 등이 대종이었지만 아쉬운 대로 신입생 한 해는 버틸 수 있었다. 더버빌가의 테스도, 김약국의 딸들도, 그리고 양공주의 펨프도 만날 수 있었다. 이 작은 공간이 바로 열여섯 살 나의 암울한 청춘극장이었다." 그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몇 권의 소설 중에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광수의 「무정」이나 심훈의 「상록수」보다 한결 수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에 개봉된 영화는 한참 후에 보았다. 용란 역을 맡은 최지희의 신들린 연기가 빛났다. 후일 소설가 이병주의 전기를 쓰면서 여러 차례 최지희를 만나 오랜 팬임을 고백할 기회를 누렸다. 부산 광복동 국제시장. 아버지를 죽인 급우: 김해 토막 살인 1학년 시절 급우 중에 잊지 못할 사람으로 김길룡이 있다. 길룡은 가장 먼저 내 눈에 띈 동급생이었다. 지체 장애인인 그는 짙은 눈썹에 강인한 표정의 청년이었다. 상체 근육이 엄청나고 팔씨름에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손오공추천 중학 시절에 어떤 영어 참고서를 읽었느냐는 것이다. 1학년 첫 모의고사에서 내가 영어 과목에서 전교 최고.을 받은 것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길룡은 한쪽 다리 무릎 아래로 의족을 착용했다. 놀랍게도 김해에서 버스로 통학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자조적 표현대로 부산에는 '병신'을 하숙생으로 받아주는 곳이 적었다. 부모는 김해 시외버스 정류소(당시는 '터미널'이란 말이 없었다) 근처에서 잡화상을 경영한다고 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나는 그가 국제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일을 도왔다. 당시 내 임시 숙소도 인근에 있었다. 5월 어느 날 태종대에 봄소풍을 갔을 때 그와 단둘이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2학년 때도 길룡과 한 반에 배정되었다. 그때 내 성적은 이미 그의 경쟁 대상권에서 멀어져 있었으나 영어만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지 가끔 말을 걸어오곤 했다. 그런 그와 소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그와 함께 걸으려면 적절한 보조를 맞추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 어느 날 함께 학교에서 내려오는 길에 갑자기 그가 쓰러졌다. 의족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마침 인근에 의족센터가 있었다. 당시에는 도처에 상이군인이 깔려 있던 때라 의족센터 또한 여러 곳에 있었다. 나는 그를 의족센터까지 부축했다. 힘겹게 부축해서 데리고 간 날더러 굳이 먼저 가라고 화를 내면서 쫓아내다시피 했다. 아마도 절대로 보이기 싫은 치부를 보였다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극도로 자존심이 강한 친구였다. 어린 시절 방앗간에서 발을 다쳤는데 의사가 잘못 처리하여 결국 한쪽 다리를 잘라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래 의사가 될 결심을 했다고 했다. 평생 소원대로 그는 의사의 길에 나섰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장애인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부산의대에 진학했다. 한동안 잊고 있던 그의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은 1972년 12월경이었다. 온 세상을 뒤흔든 '김해 토막살인사건'의 주범으로 언론에 등장한 것이다. 그가 죽인 대상은 다름 아닌 친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노름꾼에다 술주정뱅이로 집안 살림을 거덜내고 상습적으로 가족을 폭행했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는 아비를 제거해야만 한다. 그것이 사회정의에도 합당한 일이다. 계모와 모의하여 아버지를 죽였다 슬롯 릴 게임 . 그리고 시체를 분리하여 여러 곳에 매장했다. 미궁에 빠진 경찰은 시체에 가한 정교한 칼 솜씨에서 의과대학 졸업반이었던 아들에게 혐의를 둔 것이다. 당시 통념으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패륜 중 패륜이었다. 형법도 존속살해를 (직계비속 살해를 포함한) 일반 살인보다 가중 처벌한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 부산의대에는 40명 이상 부산고 동기생들이 재학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라는 생각에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조차 삼갔다. 그가 7년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중에도 그를 면회했다거나 후일담을 알거나 성의 있게 추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출옥 후에 정신질환자 부랑아로 생을 마감했다는 풍문만이 내 귀에 들려온다. 대학원에서 헌법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파고들었다. 교수가 되어서도 수업 시간에 이 사안을 근대법의 근본원리와 관련된 핵심적 토론 주제로 삼았다. 근대법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임을 상정한다. 그리하여 자유의지에 기한 자발적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부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자신이 자유의사로 선택하지 아니하고 그저 주어진 신분으로 인해 불리한 대우를 받는 것은 근대법의 기본원리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그러기에 직계존속보다 직계비속을 불리하게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상에는 나쁜 아비가 나쁜 자식보다 훨씬 많다. 천륜을 거역하고 아버지를 죽인 아들의 죄를 물으면서 '오죽했으면' 아비를 죽였겠는가 라는 정황을 검토해야 한다. 나는 그의 살부 행위를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전당포 노파를 죽인 라스콜리니코프의 행위에 비견했다. 적어도 행위자의 도덕적 확신의 관。에서는 말이다. 그 후로도 '토막살인' 사건이 더러 일어났다. 그러나 부지런히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토막살인의 '원조'격인 김해의 이 사건은 검색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1972년 겨울 아비를 토막 내어 죽인 살인범 김길룡은 철저하게 잊힌 존재가 되었다. 나는 언젠가 길룡의 꿈을 꾼 적이 있다. 몹시도 괴로운 표정이었다. 마치 구천을 헤매고 있는 원혼의 잔상을 본 듯했다. 행여 차원 높은 영적 승화를 얻을지도 모르는 그를 소재로 소설이라도 한 편 써 보고 싶은 욕망이 남아있다.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영적 승화를 얻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