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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하아빈
조회 20회 작성일 26-09-1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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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Capital)의 뿌리는 라틴어 'Caput', 곧 '머리'에 닿아 있다. 오래전 가축의 머릿수는 재산의 크기를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자본의 모습은 수백 년 동안 크게 달라졌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인간의 본성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주식시장을 '미인대회(Beauty Contest)'에 비유했다.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누구를 선택할지를 예상해 고르는 게임이다. 시장도 비슷하다. 자금이 한쪽으로 몰리면 상승은 낙관을 낳고, 낙관은 다시 더 많은 자금을 불러들인다. 군집행동(Herd Behavior)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가격을 떠받치던 믿음에 금이 가면 흐름은 빠르게 반대로 움직인다. 가격이 떨어지고, 담보가치는 낮아지며, 신용은 위축된다. 금융시스템 전체가 흔들리면 정부와 중앙은행이 등장한다. 정부는 재정을 확대하고, 중앙은행은 금리를 낮춘다. 필요하면 양적완화(QE·Quantitative Easing)를 통해 국채와 자산을 매입하며 유동성을 공급한다. 시장은 안정을 되찾고, 공포가 물러난 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위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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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의 대차대조표에서 시작된 충격을 국가가 떠안으면서 시장의 위험이 국가의 부채로 이전되는 것이다. 양적완화가 재정적자를 직접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기 때마다 재정확대와 통화완화가 반복되고 국가부채가 누적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부채의 크기보다 그것을 유지하는 비용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2025년 발표한 연구에서 흥미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강대국이 국방에 쓰는 돈보다 부채 이자를 갚는 데 더 많은 돈을 쓰기 시작하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가 。。 어려워질 수 있다는 '퍼거슨의 법칙(Ferguson's Law)'이다. 이자비용이 국방비를 넘어서는 경계선을 그는 '퍼거슨 한계(Ferguson Limit)'라고 부른다. 물론 이것이 제국 몰락을 예고하는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선택이 미래의 선택을 잠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경고선에 가깝다.
역사는 이 경계선이 왜 중요한지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1920년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오랜 기간 부채 이자비용이 국방비를 웃돌았다. 1933년에는 이자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5.5%에 달한 반면, 국방비는 2.4%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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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대영제국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탱할 재정적 여유는 이전과 같지 않았다. 과거 전쟁의 청구서가 새로운 군비와 국가전략에 사용할 자원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에 다시 한 번 막대한 부채를 남겼다. 영국은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모두 승전국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세계 경제와 금융의 무게중심은 。차 런던에서 뉴욕으로 옮겨갔다. 군사적 승리와 경제적 패권의 지속은 반드시 같은 의미가 아니었던 셈이다.
화폐의 흐름도 그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경제사학자 배리 아이컨그린(Barry Eichengreen)과 마크 플랑드로(Marc Flandreau)는 달러가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에서 파운드를 처음 앞선 시.을 1920년대 중반으로 본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과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를 거치면서 달러 중심의 국제통화 질서는 더욱 굳어졌다. 제국의 변화가 지도 위에 선명하게 나타나기 전에 화폐의 흐름이 먼저 방향을 바꾸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오늘의 미국에서 흥미로운 숫자가 나타나고 있다. 퍼거슨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은 2024년 순이자비용이 국방비를 웃돌면서 거의 한 세기 만에 다시 퍼거슨 한계를 넘어섰다. 미 의회의 비당파 재정·예산 분석기관인 의회예산국(CBO·Congressional Budget Office)은 2026년 미국의 순이자비용이 1조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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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국방에 쓰는 돈보다 과거에 빌린 돈의 이자를 갚는 데 더 많은 돈을 쓰는 상황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오늘의 미국을 과거의 영국과 그대로 겹쳐 놓을 수는 없다. 미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금융시장과 거대한 국채시장, 달러 중심의 국제결제와 금융 네트워크가 있다. 퍼거슨의 법칙 역시 미래를 예언하는 자연법칙이라기보다 역사가 보내는 하나의 경고로 읽는 것이 옳다. 다만 강하다는 것과 영원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그래서 국가부채를 볼 때 단순히 그 규모만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 부채를 유지하는 비용이 국가의 미래 선택을 얼마나 줄이고 있는가이다. 시장이 흔들리면 국가는 마지막 버팀목이 된다. 그렇다면 국가의 재정이 흔들릴 때 마지막 버팀목은 무엇일까. 결국 그 나라의 화폐를 사람들이 얼마나 믿느냐의 문제로 돌아간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위기를 넘기기 위해 동원한 부채와 화폐에는 언제나 흔적이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주가와 금리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얼마나 많은 부채가 쌓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 부채를 떠받치는 화폐의 신뢰가 여전히 견고한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버블의 흥망까지는 금융의 역사다. 그러나 화폐의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제국의 역사로 넘어간다. 화폐의 끝에는 신뢰가 있고, 신뢰의 끝에는 질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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