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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완지섭
조회 8회 작성일 26-10-0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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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미군정청. /나무위키 1945년 8월15일부터 3년간을 흔히 ‘해방공간’이라 부른다. 해방공간의 서울에서 미군정청 고위 통역관으로 지내는 한흑구는 1946년 4월 김동리 조지훈 서정주 조연현 김광주 이한직 등 젊은 문학인들이 발족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들어갔다. 그는 지면을 통해 익히 알아 온 문우들과 널리 교류하는 가운데 번역가로서는 미군 도서관을 자주 찾아 미국 대표적 시인들의 작품과 저명한 소설들을 골라 틈틈이 번역 작업을 해나가고 창작자로서는 여러 신문에 수필이나 서평을 발표했다. 수주 변영로 시인이 펴낸 영시집(英詩集)에 대한 서평도 썼다. ‘시적(詩的) 수필’의 창안자로 나가는 해방공간의 한흑구, 이것은 일찍이 1934년 7월 ‘조선중앙일보’에 “나는 조선 문단에 수필문학의 새 기운을 촉진하고자 한다”라고 선언했던 자신과의 오래된 약속을 이행하는 길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탄생한 불후의 명작 수필이 ‘나무’다. 길이는 200자 원고지 10매 미만이다. 그러나 그의 나무를 향한 묵상은, 나무가 나이테를 열 개는 새길 정도로 아주 길었다. 1961년 6월 포항의 한흑구는 ‘대구매일신문’(현 매일신문)에 발표한 수필 ‘나무-기이(其二)’에서 이렇게 털어놓는다. <나무에 대한 글을 하나 써보려고 마음먹고 있은 것은 거의 구 년째나 되었다. 가끔 나무에 대한 착상을 해보았으나 좀처럼 작품으로 구성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이상로 씨가 ‘문화’라는 잡지를 창간하는데, 짧은 글 하나를 꼭 써달라고 졸라댔다. 처음에는 시로 써보려고 했던 것을 좀 늘려서 수필로 쓴 것이 아홉 장 반의 짧은 산문이 되고 말았다.> 1947년에 탈고한 한흑구의 ‘나무’는 14개 연으로 짜인 아름다운 산문시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단아한 형식미에 깊은 사유를 내재한 ‘시적 수필’의 효시이고 명품이다. 다음은 ‘나무’의 중간 부분이다.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아침에는 떠오르는 해를 온 얼굴에 맞으며, 동산 위에 홀로 서서, 성자인 양 조용히 머리를 수그리고 기도하는 나무. 낮에는 노래하는 새들을 품안에 품고, 잎마다 잎마다 햇볕과 속삭이는 성장(盛裝)한 여인과 같은 나무. 저녁에는 엷어가는 놀이 머리끝에 머물러 날아드는 새들과 돌아오는 목동들을 부르고 서 있는 사랑스러운 젊은 어머니와 같은 나무. 밤에는 잎마다 맑은 이슬을 머금고, 흘러가는 달빛과 별 밝은 밤을 이야기하고, 떨어지는 별똥들을 헤아리면서 한두 마디 역사의 기록을 암송하는 시인과 같은 나무.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이렇게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의 원고를 소설가 김광주가 여기저기 보내서 고료를 받아냈다. 물론 오직 ‘술값’ 마련이 목적이었다. 이것을 한흑구는 ‘나무-기이(其二)’에서 해학적으로 “나무를 팔았다”고 추억한다. <한가한 틈이 있을 때, 김광주 씨가 경향신문사의 문화부장이었던 김동리 씨를 전화로 부르고 나서 옆에서 독서를 하고 있는 여기자를 불러서 원고를 베끼라고 명령을 하였다. 원고를 다 베끼고 난 여기자는 원고를 갖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에 여기자는 봉투를 하나 들고 들어와서 김광주 씨에게 주었다. 김광주 씨는 나를 보고 웃으면서 그 봉투를 나의 앞으로 던졌다. 봉투 속에는 백 환짜리 열 장이 들어 있었다. “아니, 이게 웬 돈이야?” 물었다. “응, 그거 ‘나무’ 판 돈이야. 손오공 ‘나무’.” 광주 씨는 웃으면서 더 설명하려 하지 않고, “술이나 한 잔 사아!”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매일 마시는 술값이 쪼들리던 때라, 내 ‘나무’라는 수필을 ‘경향신문’에다가 중매를 한 셈이었다. 한 번만 중매를 했으면 그만이었겠지만, 독서와 교정에 바쁜 여기자를 시켜서 광주 씨는 나의 ‘나무’를 갖고 장안에 나무장사를 펴놓았다. 그 후 그는 같은 방법으로,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하던 ‘서울주간’과, 심지어는 ‘농업은행회보’에까지 내 ‘나무’를 팔았다.> 그런데 단 한 푼도 수금하지 못한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다. <그 다음 일 년 후에는 문교부에서도 나의 ‘나무’를 사들여서 중등 국어책에 실었으나, 술값 한 푼, 주문서 한 장 받지를 못했다.> 분단의 독립정부를 출범하여 마냥 어수선한 대한민국 문교부(교육부)는 저작권료에 대한 개념도, 그것을 지급할 예산 항목도 없었을 테니 한흑구의 ‘나무’를 공짜로 짊어지고 간 것이었다. ‘나무’를 쓴 무렵의 한흑구. /한동웅 제공 소설가 김동리. /경향신문 소설가 김광주. /네이버 지식백과 시인 서정주. /네이버 블로그 시인 조지훈. /네이버 블로그 수필가 김진섭. /목포시청 아동문학가 마해송. /경인일보 수주 변영로. /아시아경제 해방공간을 회고하는 한흑구. /한동웅 제공 통역관 한흑구의 월급봉투는 두툼했다. 그것도 미국 지폐, 달러였다. 해방공간의 서울에 거주하는 어느 문학인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편이었던 그는 가난한 문인 동료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언제나 안주머니의 지갑을 아낌없이 빼내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때 문인들의 회합은 언제나 ‘반드시’ 성큼성큼 술자리로 가서 흔들흔들 술자리에서 헤어졌다. <내가 함께 술을 마셔 본 이들 중에서 제일급(第一級)을 꼽아보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 우선 수주(樹洲)를 비롯해서, 월탄(月灘), 청천(聽川), 공초(空超), 춘해(春海), 무애(无涯) 제씨(諸氏) 등은 두주급(斗酒級)에 속했다. 대주가급은 청마(靑馬), 지훈(芝薰), 미당(未堂), 해송(海松), 광주(光洲), 인욱(仁旭), 구상(具常) 등을 들 수 있다. 대주가급에 속하는 이들은 주량이 약주로 친다면 대두(大斗)나 반두(半斗)쯤은 처리할 수 있고, 맥주라면 몇 타(打)씩, 위스키일지라도 사합(四合)들이 한 병은 감당했다.> 이 회고는, 포항의 한흑구가 1973년 2월 ‘월간문학’에 발표한 수필 ‘주도소칙(酒道小則)’에 담은 것이다. 여기에 등장한 주호들은 당대 한국문학의 거장들이다. 수주는 영문학자이며 시인인 변영로(卞榮魯, 1898~1961), 월탄은 소설가 박종화(朴鍾和, 1901~1981), 청천은 독문학자이며 수필가인 김진섭(金晉燮, 1908~미상), 공초는 시인 오상순(吳相淳, 1894~1963), 춘해는 시인이며 소설가인 방인근(方仁根, 1899~1975), 무애는 신라 향가를 연구한 학자이며 시인인 양주동(梁柱東, 1903~1977), 청마는 시인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지훈은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시인 조지훈(趙芝薰, 1920~1968), 미당은 시인 서정주(徐廷柱, 1915~2000), 해송은 아동문학가 마해송(馬海松, 1905~1966), 광주는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인 소설가 김광주(金光洲, 1910~1973), 인욱은 소설가 최인욱(崔仁旭, 1920~1972), 그리고 구상(具常, 1919~2004)은 본명이 구상준으로 한흑구와 유사한 신변 위협에 부닥쳐 1947년 2월 원산을 탈출해 서울 문단에 합류한 시인이다 무료충전바다이야기 . 서울 문단에 합류한 한흑구가 각별한 술잔을 자주 나눈 문우는 동년배나 다름없는 소설가 김광주, 여남은 살 아래의 조지훈, 열댓 살 손위의 공초 오상순, 그리고 여섯 살 아래의 미당 서정주였다. 1970년대 들어 한흑구는 포항에서 그들과의 잊지 못할 추억담을 ‘현대문학’에 실어둔다. <조지훈은 거의 매일 같이 명동에서 만났고, 광주, 인욱, 공초 선생과 같이 술값이 싸다는 ‘무궁화’ 주。에서 놀았다. 통금 시간이 되어도 술이 부족하면, 우리 집으로 가서 밤을 새워가며 술을 마시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는 약주도 잘 마셨지만 소주, 빼주(빼갈), 위스키 무엇이나 다 잘 마셨다. 지훈은 영국의 미의 시인 키츠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키츠는 시만 썼지만, 지훈은 국문학, 사학, 민속학, 종교 등을 통해서도 미를 탐구하려는 노력이 컸다고 생각한다.> <서정주는 술상이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움직거리지도 않았다. 한편에 부처님같이 고개를 들고 앉아서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뜰 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얼마간 앉아 있으면, 또 싫증이 나는지, 그대로 팔꿈치를 베고 반듯이 누워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누워 있으면 눈이라도 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비해서는 크다고 할 만한 두 눈을 초롱같이 동그랗게 뜨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흰 천장 위에는 파리 한 마리도 없었다.> 소설가 김광주가 돈암동에서 청계천변 좁은 골목 안에 작은 셋방을 얻어서 이사한 다음의 어느 저녁이었다. 한흑구, 조지훈, 서정주 등 서넛이 거기로 몰려가게 되었다. 한흑구가 마련한 술병들을 꿰차고 있었다. <부인과 애들도 있고 하니, 웃거나 떠들지 말고, 곱게 앉아서 술을 마시기로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너, 오늘 또 떠들었단 안 돼!” 나는 주먹을 내밀면서 정주에게 부탁했다. 그는 한 번 빙그레 웃고,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도, 나도 꽤 떠드는 편이었지만,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마른오징어 발만 씹고 있었다. 한참 말없이 마시는 술이 한 되가 거의 다 내려가고, 사분의 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한형, 나 아직 주정 안 했지?”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을 들어보고 정주가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래. 오늘은 참 용하구먼. 주정도 안 하구. 오늘은 술이 센데. 술 두 되를 다 먹구두, 말 한마디 안 하구.”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뒤에 감추어 두었던 술 한 되를 그의 앞에 내놓았다. “허허, 글쎄 내가 안 취했어! 한 병이 아직 남았구먼.” 그는 좋아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나는 그에게 떠들지 말도록 또 부탁을 했고, 그는 좋아서 고개를 끄떡하였다. 그는 취하기만 하면 곧 엑스터시를 느끼는 것이었고, 엑스터시도 ‘시적인 광상과 광희병’에 걸려서 무아경에 빠지는 수가 많기 때문이었다. 이날, 우리는 방 안에서 조용히 술을 마셨지만, 오히려 밖에서 여인네들이 떠드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이 때문에 우리는 떠들지도 못하고 술만 마셨는지도 모른다. 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광주는 ‘청계천변’이란 단편을 하나 쓰게 되었고, 정주는 엑스터시를 안은 채 곱게 마포 집으로 돌아갔다.> /이대환 작가 미국 대표적 시인